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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건국전쟁」(김덕영 감독) 2024년 다큐멘터리 영화

by love88 2025.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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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감독의 이승만 대통령 건국전쟁 사진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전쟁 사진 (김덕영 감독의 2024년 타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전쟁」(김덕영 감독) 줄거리, 인물, 관점 및 총평

✅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와 업적,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치열한 역사적 갈등을 밝혀낸 작품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에서 대한민국 건국한 국가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노력, 그리고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대한민국의 건국사에 밝혀지지 않은 역사 기록물을 미국에 있는 보관소까지 찾아가며 발견한 자료를 바탕으로 70년 동안 잠자고 있던 현대의 대한민국 국민이 모르는 내용을 제시하며, 대한민국을 위해서 헌신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국민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해 깨닫고, 김일성이 제일 싫어한 인물이기에 공산주의자들이 60년 이상 이승만 대통령 지우기 작업으로 많은 국민들이 대통령의 업적을 알지도 못하고 동상하나도 없이 무시한 일과, 영혼을 갈아 넣어서 하느님의 기독교 정신으로 세운 자유 대한민국을 세워준 것에 그리고  대한민국에 자유의 위대함을 다시 느끼게 되고 살게 된 것에 정말로 감사함을 느껴서 모두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보낸 작품이다. 


1. 「건국전쟁」 줄거리

이 다큐멘터리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기까지 겪었던 정치적 투쟁과 국제 사회 속에서의 외교적 노력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 1막: 젊은 이승만,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찾다

  • 1875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이승만은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은 왕족 출신이지만, 일본과 청나라(중국)가 우리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 땅과 바다에서 싸웠던 청일전쟁(1894~1895)이 터지던 해에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기 시작하여 서구문물에 눈뜨고  개화 사상에 접하게 됩니다. 대한제국 시기 독립협회 청년 지도자로서 나라가 외세(러시아, 중국, 일본)에 짓밝히며 쓰러져 가는 것을 보고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민주개혁등 개화에 필요성으로 개혁을 주장하며 앞장섰고 국민을 계몽하고 여론을 조성하기 우해 현대식 토론회도 개최하고 매일신문 발간하고 독립신문과 협성회보에 주필을 게재했고 거리에 나가 연설도 하고 시위을 하다가 24세에 젊은 나이에 역모죄(왕실에 반역한 죄)로 한성 감옥에 투옥됩니다. 감옥안에서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7년째 감옥살이 하던중 우리나라 중간층 이상이나 한문을 안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썩고 잘못된 관습에 물들어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한제국의 장래가 백성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여 각성시키기 위해서 감옥에서도 개화구국운동은 계속되어 가짜 이름으로 논설문을 써서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 게재해왔고 러일전쟁이 터지자 끓어오르는 분노와 절박한 심정으로 감시 받는 상황에서도 블굴의 의지로  "독립정신"이라는 국민 계몽 책을 썼다. 이 책은 조선왕조와 조선을 둘러싼 주변정세를 일본, 청라나(중국), 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노린 것이 무엇이며, 애국심의 중요성으로 근대적 국가의시과 민족주의 사상을 이야기 하고 또 자유민주주의 중요성과 국민이 깨어나야 나라가 부강할 수 있기에 교육을 강조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한다고 말한 책이다.   원고를 비밀리에 미국으로 반출해 1910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도었고 대한제국 말기에 민영환 등의 도움을 받아 특별사면되고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의 밀사자격으로 워싱턴으로 출국하고 존헤이 국무장관을 만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문에 따라 협조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의 사망으로 허사가 되고 조지 워싱턴대 2학년으로 입학하면서 유학이 시작되었다. 그후 하버드대, 프린스턴대에서 정치사상을 배우며 박사학위를 받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우고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이후 유럽과 시베리아를 거처 귀국, YMCA에서 총무와  청년학교 학감으로 교육 및 전도활동을 했으나, 일본총독부의 기독교 지도자들 체포한 "105인 사건"으로 체포될 위험이 높아지자 미네아폴리스에 열리는 "국제기독교 감리회 총회"에 평신도로 참석함으로써 체포를 면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윌슨(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추천서로 워싱턴 등을 다니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국제무대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국인이 많은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삼고 활동하며 외교적 노선을 걷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대한민국 건국과 생존에 바친 인물입니다. 미국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조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 2막: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외교 독립론

  • 1919년, 1월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고 3.1운동 이후 러시아지역 한인 임시정부에서 국무경으로 추대,상해 한인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를 거쳐서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로 추대되고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대통령 명의로 미국 등 주요 국가의 국가원수와 파리 평화회의 의장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 발송하고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과  "구미위원부"설립하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재정확보를 위해 임시정부 공채를 발행하며 상해 임시정부 위정원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대통령에 부임하기 위해 비서 임명직과 함께 일본이 30만 달러의 체포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에 중국인 시체들을 실은 화물칸에 몰래 타고 상해 임시정부 태통령에 취임식에 참석하고 5개월간 집무하면서 임정요원들 간의 노선 갈등으로 크게 시달리고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 때문에 상해를 출발해서 호눌룰루에서 민찬호등과 대한인동지회 조직하고 워싱턴 군비축소회의에 참석하고 미국 대표단에게 "한국독립청원서" 제출하고 노선갈등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이유로 면직되고 그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제연맹에 한국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제네바에서 프랑스어 일간선문 "주르날 드 제네바"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을 국제연맹 각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고 제네바의 호텔 식당에서 프란체스카 도너 양을 만났고 다음해 10월 뉴욕에서 결혼(당시 59세)했다. 호눌룰루로 돌앙와 독립운동하다 2차 대전 발발의 징후가 보이자 워싱턴으로 돌아와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는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를 뉴욕에서 출판, 12월에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임시 정부 승인과 무기지원 획들으러 목표로 미국인 중심으로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창설하고 한미협의회와 재미 한족연합위원회 공동으로 워싱턴에서 한인자유대회 개최하고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정 즉각 승이니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하고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카이로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패망 후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계속 대통령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하고 미 국무차관에게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의 즉각 승인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내니 8.15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긴 미 국무부의 방해로 귀국이 2개월간 지연되었다. 

🔹 3막: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정치적 전

   
       1945년 해방 후 33년만에 김포 공항에 도착 후 담화 방송을 하고 허헌 등  좌익세력이 방문하여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요청으로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직을 맡았으나 신탁통치를 찬성한 공산 세력과 결별을 선언하고 미 군정청         자문기구인 민주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모스크바 3 상회가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위배되기에  결정을 취소하라고 성명하고 소련이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에 남한만이라도 과도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다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하지 장군과의 협조포기 선언으로 미 군정에 의해 가택연금 당하고 소련의 진의 파악           후 미국이 이승만의 주장에 동조하여 유엔 총회에서 유엔감시하에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김구 등         의 남북  협상은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 담화 하면서 한반도가 분단된 상태에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실시되었고 재헌 의회 의장이 되었고,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제정 → 대통령 중심제, 삼권분립 원칙을         확립함. 7월 20일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됩니다.( 대한민         국 초대 대통령 취임)48년 말로 예정된 미군철수 연기를 요구하고 여수순천반란사건에 따른 국가위기 수습책 국회에서 발표하고 대마도 반환 요구 기자회견하며 반민 위특위의 친일파 처벌에 신중성을 기하고 필리핀 제안한 태평양동

       맹안 지지하고 체결 협의를 위해 장개석과도 회담하고 야당이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대한 개헌 여부는 국민투

       표로 결정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저지하고 농지개혁법 공포로 소작농에게 사유재산으로 땅을 분배해 주면서 북한

       공산 정권과 대립하며 1948년 제주 4.3 사건, 여순 반란 사건 진압 → 좌익 세력의 무장 봉기 진압하고 1949년 반공법         제정 → 공산주의 확산 방지 정책 시행하여 "반공(反共)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대한민국 헌법을 통해 국민 주권,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 원칙을 명확히 하고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강경한 정치 노선을 걸으며 가장 큰         업적인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한 것입니다.

🔹 4막: 6.25 전쟁과 대한민국의 생존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면서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도쿄의 맥아더 장군과 통화로 지원 요청후 트루먼대통령에게 즉각 지원을 요청하도록 지시하고 측근들의 권유로 기차로 대구까지 갔으나 서둘렀다는 판단이 들어 대전으로 돌아와서 각료회의를 개최후 맥아더 장군과 한강 전선을 함께 시찰 후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유엔총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위임하고 유엔과 상의 없이 국군에게 38선 이북 진격을 명령하고 북한에 대한 직접 통치를 선언함으로써 유엔과 대립 수복된 평양을 방문하여 환영대회에서 연설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휴전협상 반대 전문 발송후 휴전 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하의 북한 총선거 요구하고 일본 어선의 침범을 막기 위한 평화선 선포하고 직선제를 통한 대통령 당선(제2대 대통령)하고 미국 대통형 아이젠하워와 회담하고 일본 요시다 총리와도 회담 후 국무회의서 해양주권선 수호 언명, 휴전 전에 한미상호방호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미국원조 없이 싸우겠다고 후퇴없는 단호한 입장을 발표하고 유엔군 포로수용소에서 2만 7천 명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로버트슨 미 대통령 특사가 이 대통령 설득을 위해 한국 방문하여 14차례 회담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1953년)과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원조 약속을 포함한 한국공동성명 발표로 미국의 군사 지원과 경제 지원을 공식적으로 확보하여 대한민국 재건에 기여했습니다.  헐 유엔군사령관, 테일러 미8군사령관 등과 한국군 증강 문제 협의하고 주한미군 2개 사단 철수계획 강력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인 독립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미국 방문시 카퍼레이드 등으로 환영을 받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고 소련의 침략 야욕을 강조하고 무력만이 대응책이라고 주장하고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 5막: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틀 마련과 정치적 논란

  • 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반공정책을 강화하고, 한미동맹을 공식화합니다. 하지만 1952년 2대 대통령 당선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며 정치적 탄압 강화하고  점점 강경한 정치 스타일을 보이며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신익희가 급사하면서 재선 성공(제3대 대통령 당선,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 )하고 장기 집권을 추진합니다.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 강조하고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 국군의 날 공포하고 국군 현대화를 위해 미군의 지원을 요청하고 국무회의에서 한글전용 지시하고 한국에서 유엔군 철수 불가 성명하고 외신기자 회견에서 국군 감축 반대와 장비 현대화를 강조하고 원자력 연구 지시로 한국원자력연구소 설립하고 미국 적십자에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 저지를 요청하고   1960년 3.15 선거에서 대통령 4선 확정되었으나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이 발생하고, 경찰 발포에 따른 사상자 발생에 애도의 뜻을 발표하고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 사임, 정.부통령선거 재실시, 이기붕의 공직사퇴 등을 약속하고 시위대 대표 5인과 면담 시 햐야 약속하고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결국 국민적 저항 속에서 하야하게 됩니다. 다음 날 이화장으로 은퇴하고 3개월 계획으로 정양차 하와이로 출국했으나, 내각제 지지자들과 경향신문에서 망명으로 발표하여 대한민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호놀눌루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90세로 서거하고 한인기독교회에서 영결예배 후 유해를 미 군용기로 김포공항으로 운구, 7월 2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예배후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하와이로 망명한 후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지만, 그가 만든 대한민국의 기반은 이후에도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반공 체제를 확립한 공로가 크지만, 말년에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며 독재자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3.15 부정선거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정권의 부패와 독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례가 되고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주요 등장인물

🎬 이승만 (주인공,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핵심 인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미국 유학을 통해 서구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한반도 공산화를 막기 위해 반공 노선을 고        수하고 강한 정치적 신념을 바탕으로 독재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국가 생존을 위한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 평가되고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주의(反共主義)"를 강력하게 내세우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했습니다.

🎬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의 아내) :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이승만을 내조하며 대한민국의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하며 대        한민국 국민국민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남아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에도 끝까지 그를 지지하고 보좌하          였습니다.

🎬 김구 (임시정부 지도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이승만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함께 협력했지만, 건국 과정에서 정치적 입장이 갈리면서 공산주의 소련을 지지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을 원했습니다. 

🎬 소련과 북한 지도부(스탈린, 김일성 등) :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으며, 6.25 전쟁을        일으키고 이승만과 정치·이념적으로 대립하는 주요 세력입니다.

🎬 미국 지도자들 (해리 트루먼, 아이젠하워 등) : 6.25 전쟁 시 이승만과 협력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한 미국 대통령들로 대        한민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한미동맹을 맺어 한국의 안보를  보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강경한 정치 스타일과 독        자적인 외교 노선에 대해 불만을 가지기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미동맹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 박정희 (군사 쿠데타 후 제3공화국 출범 인물) : 1960년대 군사정권을 이끌며 이승만 체제 이후 새로운 정치 구조를 만        든 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이 구축한 한미동맹과 반공 노선을 계승했으며,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 원자력발전도            더 발전시켰습니다.

3. 「건국전쟁」의 관점 

 

 이 다큐멘터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강조하는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1.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만든 지도자"라는 긍정적 시각으로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설한 이승만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유지한 점을 강조했습니다. 2. "반공주의 투쟁의 지도자"로  이승만이 공산주의와 싸우며 대한민국의 체제를 지킨 점을 강조하고 6.25 전쟁과 북한, 소련과의 대립을 통해 자유를 지키려 했던 지도자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3. "논란이 있지만 대한민국을 세운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권위주의적인 정치 운영과 부정선거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기초를 세운 점은 부정할 수 없다는 관점이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유학하며 서구식 민주주의와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가 깊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강력한 외교 관계를 형성하며 대한민국의 생존 기반을 다졌습니다.

4.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사람”  “6.25 전쟁의 리더십”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 국제사회의 지원을 끌어낸 이승만의 결단력을 높이 사고 있으며 "후퇴 없는 전쟁"을 주장하며 끝까지 싸운 그의 모습에서 지도자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5 “논란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든 인물”로 부정선거와 독재 논란이 있지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착시키고,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과가 분명한 지도자로 평가됩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 북한의 남침에 맞서 대한민국 방어하고 북한이 기습 남침했을 때 대한민국은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UN의 지원을 끌어내 대한민국을 지켜냈습니다. 📌 역사적 의의:  한반도가 공산화될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지켜냈고,  한미동맹의 기반을 마련해 대한민국의 안보를 강화하고  "북진 통일론"을 주장하며 대한민국의 공산화 저지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4. 「건국전쟁」 총평 – 대한민국 건국의 진실을 밝히다

장점 :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의 역할을 재조명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 수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 간과되었던 이승만의 국제 외교 전략과 반공 투쟁을 깊이 있게 다루고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양한 역사적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하려 함.

단점 :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정치 운영과 독재적 행보에 대한 비판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고, 반공주의적 관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다른 역사적 해석과 견해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총평:
  「건국전쟁」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의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을 재조명하며, 그가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강조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은 인물이지만, 대한민국이 지금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는 데 있어 그의 기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국민이 직접 선출한 지도자(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정부)를 가진 국가가 되고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하는 계기를 마련하며  "한반도에서 단독정부를 세울 것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주권 국가를 탄생시키며 헌법을 제정하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애국가에 하느님께 대한민국을 했습니다.  역사적 의의로는  대한민국이 미국과의 군사·외교 동맹을 맺으며 안보를 강화하고,  북한 및 소련의 위협 속에서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독립 국가로 만들었고  전후(戰後) 대한민국 경제 재건을 위해 미국의 지원을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복구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정책으로 경제 재건과 산업 기반을 조성하였고 특히 1950년대 초, 미국의 경제 원조를 활용해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하였고 1952년 농지개혁 실시 → 지주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개편하여 농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여 경제 구조를 근대화했고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초석을 다졌고 공업화의 기초를 마련하며,  원자력연구소를 세워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 정책으로 이어질 기반을 형성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남긴 유산이 70년 동안 자유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평가 논란이 – "대한민국을 세운 영웅" vs. "독재자로 변한 지도자"로 평가가 갈라지고 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인물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말년의 권위주의적 정치와 독재 논란으로 인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사실이긴 하나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고 정신적으로 재정적으로나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를 건국하고 북한으로부터 오는 공격을 방어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집권이 필요했음을 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어느 대통령도 

이승만 대통령처럼 외교, 경제, 정치에 박식하고 애국심을 지니고 생명을 바쳐서 대한민국을 위해서 투신한 대통령은 볼 수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 정권의 초석을 바탕으로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제를 발전시켜서 큰 업적을 이루어냈으나  현재는 김일성 북한 정권  60년 이상 간첩활동으로 우리의 과거 역사를 잃어버리고 이기심과 도덕적 타락, 공산주의 사상이 물들어서 미국을 반대하고 대한민국을 지켜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필요 없다고 하고 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미국의외에서도 로비 활동을 하고 국내에서도 국회 진입해 법을 개정하고 있고 거기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도 모르고  좌파의 여론에 선동되어 역사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런승만이라 모욕하며, 미국은 미국을 건국한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 동상도 있고 지폐도 있는데,  대한민국은 동상도 지폐도 그 어느 것도 초대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울대에 중국에서 돈 받고 시진핑 동상이나 세우고 있고 국회에도 친북, 친중 간첩이 대한민국을 파멸시키는 작업을 계속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안위와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일부 기득권이 조선시대처럼 호위호사하려고  내각제 추진과 더불어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시도한 낮은 연방제로 시행할 것을 계획하고 있고 거의 80프로 정도 완성된 상태이다. 조선시대 후기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은 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으로 포위되어 있고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상태인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경제 발전의 풍요와 물질의 부로 인해서 돈이 최고가 되었고 정신이 타락하여 도덕이 문란하고 마약과 경제 사기범이 판을 치고  나라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판친다. 그래서 돈이면 나라도 팔아먹는 친중 매국노 공무원, 기업인, 정치인,  법조인, 국회의원, 언론인들로 법이 무너지고 중국인에게 영주권을 남발하여 우리의  주권인 선거권과 기업마저 헐값으로 중국에게 넘겨주고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교육과 언론도 간첩이 장악하여 국민들이 좌파사상에 물들어 있어서 잘못된 것을  모르고 공산주의에 속고 있고  초등학교에는 김정은이 친구라고 하는 책까지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국민들이 다시 정신 차리리 않으면 대한민국에 미래는 암울하고 공산주의 체제에서 우리의 후손들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제시한 독립정신을 다시 공부하고 새롭게 태어나서 살아내야 함을 제시해 봅니다. 다시 한번 "건국전쟁" 영화를 통해 사실을 알게 해 준 김덕영 감독님께 감사드리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서 헌신해 주신 초대 이승만 대통령께 감사드리며, 망가져 가는 대한민국에 이승만 대통령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정신 차려서 지유민주주의가 지켜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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